자캐/로그

전언

하루0917 2024. 1. 1. 17:33

분기점은 늦여름의 밤이었다.

주방 근처에 놓인 식탁, 백열전구의 빛에 의지해 글자를 적어내리던 벤자민의 귀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닿았다. 벤자민은 쓰던 편지를 펼쳐놓은 채로 일어서며 머릿속에 다음에 쓸 문장을 되뇌었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현관 앞에 서 차가운 금속제의 문고리를 돌려 당긴다. 백열전구의 빛이 현관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덩치 큰 형체에 가로막혔다.

미약한 불빛이 닿은 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가 헉슬리 씨 댁인가요?"

"네. 아버지를 찾으시나요?"

"아니요. 벤자민 군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유진의 건으로 말입니다."

"제가 벤자민이예요. 저희 외삼촌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직후 벤자민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가을이 다가옴을 알리는 서늘한 바람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구별해낼 새도 없이 벤자민은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자 순간이었다. 벤자민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은 낡은 목조 주택의 현관에서 세인트 멍고 병원의 입구로 변했다. 면회 절차를 밟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은 분별력이 떨어져 시간 감각이 이상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5층의 주문 상해과 병동. 벤자민과 남자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한 병실에 들어섰다.

굴곡이 진 짧은 금발의 중년 남성이 흰색 침대에 눕혀 있었다. 유진이었다. 벤자민의 외삼촌 말이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잠에 든 것처럼 평온했으나, 아무리 그를 깨워 보아도 전혀 기별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마법인지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실례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친구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병실에서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남자가 설명하려던 간호사의 말을 끊었다. 다소 언짢은 낯이었으나 간호사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병실의 문이 닫혔다.

간호사가 나간 것을 확인한 남자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긴 설명이 이어졌다. 영원 같기도, 찰나 같기도 한 순간이 지났다.

사람은 언젠가 변한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무언가 하나쯤은 변하기 마련이다.

벤자민의 변화는 그 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삼는다.

벤자민 유진 헉슬리가 오러가 되고자 결심한 것은 그 순간부터였다.